목회자 칼럼 PASTORAL COLUMN
"'헬리콥터맘'과 '빗자루맘'"

얼마 전에 신문을 읽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헬리콥터맘'과 '빗자루맘'이라는 단어였습니다. 헬리콥터맘은 자녀 주위를 맴돌며 자녀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서는 엄마를 지칭합니다. 빗자루맘은 자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장애물만 치워주는 식으로 간섭을 최소화하는 엄마를 뜻합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또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올 한해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생각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때로는 ‘빗자루맘’처럼 행하실 때도 있으셨지만 ‘헬리콥터맘’처럼 행하실 때도 있으십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헬리콥터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한 아이들에게는 ‘빗자루맘’이면 충분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헬리곱터맘’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아직도 어린아이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수도 있지만 우리들에게 있는 장애물만 치워주는 식으로 간섭을 최소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이 귀찮아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가 자라서 청년이 되고 성년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더욱 성숙한 성년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가르쳐 주신 방법을 기억하고 실천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빗자루맘’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셔도 우리는 실로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올해를 되돌아보면서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성숙된 삶을 살기를 원하시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헬리콥터맘'과 '빗자루맘'처럼 행하셨던 것을 감사해야겠습니다. 돌아오는 새해부터는 '헬리콥터맘'과 '빗자루맘'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지 않으셔도 감사하며 사시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성숙하고 성장한 모습의 삶을 살고,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또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올 한해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생각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때로는 ‘빗자루맘’처럼 행하실 때도 있으셨지만 ‘헬리콥터맘’처럼 행하실 때도 있으십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헬리콥터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한 아이들에게는 ‘빗자루맘’이면 충분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헬리곱터맘’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아직도 어린아이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수도 있지만 우리들에게 있는 장애물만 치워주는 식으로 간섭을 최소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이 귀찮아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가 자라서 청년이 되고 성년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더욱 성숙한 성년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가르쳐 주신 방법을 기억하고 실천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빗자루맘’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셔도 우리는 실로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올해를 되돌아보면서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성숙된 삶을 살기를 원하시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헬리콥터맘'과 '빗자루맘'처럼 행하셨던 것을 감사해야겠습니다. 돌아오는 새해부터는 '헬리콥터맘'과 '빗자루맘'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지 않으셔도 감사하며 사시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성숙하고 성장한 모습의 삶을 살고,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며 삽시다.”

얼마 전에 뉴욕교계 모임이 있어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연세가 있으신 분이 앉으셨습니다. 그날은 선거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선거 봉사 위원 목사님께서 투표용지를 안쪽에 있는 저에게 먼저 주시고, 옆자리에 계신분이 통로 쪽에 앉으셨기에 그 다음에 나눠드리다가 투표용지를 바닥에 떨어트렸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계신분이 용지를 집으면서 다짜고짜 목사님께 들으라고 ‘그 새끼 종이도 제대로 못 나눠 주네’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말을 듣고서도 아무 말 없이 다음 분들에게 종이를 나눠주었습니다. 저는 너무 기가 막히고 놀라서 앞만 쳐다보았습니다. 이 분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분일 것이고, 평신도 아니면 목사일 텐데 라고 생각하니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한편으로는 평소에도 서로 아는 관계가 아닌가? 두 분만의 무슨 사연이 있어서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을 옆에서 들은 제가 연세 드신 분께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공식적인 모임이고 주위에 많은 분들이 모였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본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교인은 교회 안에만 있고 교회 밖에는 없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현대교회의 숨기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따끔한 지적의 말입니다. 이 말은 저에게도 심히 부끄럽게 합니다. 사역하면서 교회 안의 양들은 많이 만들려고 하지만, 정작 교회 밖에서는 말씀을 듣고 생활에 실천하는 교인들을 많이 양성하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인들이 교회 밖에서 설교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최근에 발생하는 크고 작은 비리사건에 목회자나, 장로나 권사, 집사 곧 직분 자들이 연루되지 않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빛을 가리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수없이 듣습니다. 그런데 생활의 적용은 세상 사람인지! 그리스도인인지! 구별이 안 되게 엉망입니다. 예배 중 설교를 귀로는 듣고 연신 ‘아멘’을 힘차게 외쳐댑니다. 그런데 삶의 적용 없이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구별되게, 모범을 보이고 살아야 합니다. 한 주간의 삶을 되돌아보시고, 한 주간을 시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부디 말씀을 삶에 적용하며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시는 예본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인은 교회 안에만 있고 교회 밖에는 없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현대교회의 숨기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따끔한 지적의 말입니다. 이 말은 저에게도 심히 부끄럽게 합니다. 사역하면서 교회 안의 양들은 많이 만들려고 하지만, 정작 교회 밖에서는 말씀을 듣고 생활에 실천하는 교인들을 많이 양성하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인들이 교회 밖에서 설교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최근에 발생하는 크고 작은 비리사건에 목회자나, 장로나 권사, 집사 곧 직분 자들이 연루되지 않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빛을 가리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수없이 듣습니다. 그런데 생활의 적용은 세상 사람인지! 그리스도인인지! 구별이 안 되게 엉망입니다. 예배 중 설교를 귀로는 듣고 연신 ‘아멘’을 힘차게 외쳐댑니다. 그런데 삶의 적용 없이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구별되게, 모범을 보이고 살아야 합니다. 한 주간의 삶을 되돌아보시고, 한 주간을 시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부디 말씀을 삶에 적용하며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시는 예본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려고 얼마나 애쓰고 수고하십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교황을 만나기 위해 오래된 버스를 리모델링해서 타고 아르헨티나에서 필라델피아까지 194일 동안 13,000마일을 달려온 가족이 있었습니다. 캐타이어 워커와 부인 노엘, 그리고 3살에서 12살까지의 아이 넷이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출발한지 거의 6개월을 넘겨 13개 나라를 지나서 도착하여 교황이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교황은 이 가족을 보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온 가족입니까? 여러분 미쳤군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다는 미주중앙일보 9월 29일자 신문을 보았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인간인 교황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얼마나 수고하고 애를 쓰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지나실 때 길가에 있던 맹인 바디매오를 만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맹인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나서지 말라는 군중의 말도 신경을 쓰지 않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며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애쓰고 수고하며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만나 주셔서 그의 눈을 고치시고 영혼도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라고 약속하신 말씀처럼,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보잘 것 없는 우리를 만나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은 복중에 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맹인 바디매오처럼 애쓰고 수고하며 하나님 앞에 열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으시기를 원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 손에 붙들려 이 한 주간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를 읽고 인간인 교황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얼마나 수고하고 애를 쓰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지나실 때 길가에 있던 맹인 바디매오를 만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맹인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나서지 말라는 군중의 말도 신경을 쓰지 않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며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애쓰고 수고하며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만나 주셔서 그의 눈을 고치시고 영혼도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라고 약속하신 말씀처럼,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보잘 것 없는 우리를 만나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은 복중에 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맹인 바디매오처럼 애쓰고 수고하며 하나님 앞에 열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으시기를 원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 손에 붙들려 이 한 주간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지난 주 10월 1일 목요일에 오리건 주 엄프콰 커뮤니티칼리지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총격 사건의 용의자는 26세 남성인 크리스 하퍼 머서입니다. 미국 사회에 충격을 안긴 가운데, 범인이 기독교인을 겨냥해 총을 쐈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범인에게 총을 맞아 척추 수술을 받게 된 한 부상자의 아버지는 CNN과 인터뷰에서 “기독교인을 골라서 총을 쏜 것으로 보인다”며 “범인이 기독교인이라고 대답한 학생들에게 ‘다행이다. 곧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돼서’라고 말한 뒤 총을 쐈다”고 딸의 증언을 전했습니다. 또한 당시 현장에 있던 부상자의 가족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날 범인은 총을 쏘기 전 먼저 기독교인지를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한 학생들은 머리를, 아니라고 하거나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람들은 다리를 쐈다”고 전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저녁에 기도하는데 ‘내게 이런 상황이 왔을 때 과연 무엇이라고 고백했을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창 젊은 날에 갑자기 찾아온 죽음 앞에서 끝까지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한 희생자들에게서 깨닫는 것이 많았습니다.
희생자 가운데 죽음을 준비했던 자가 과연 누가 있었겠습니까? ‘죽음’이란 인생에 있어서 필연적이고, 또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야할 길입니다. 천하의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우리는 1분 후의 세상도 모릅니다. 지상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죽음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의 준비를 믿음으로 미리 하십시다. 그래서 눈앞에 죽음이 닥쳐와도 불안해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리 목숨처럼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굳게 지키고, 영적으로 병들어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특별히 미국의 총기 규제를 위해서, 다시는 이러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들의 장례식을 위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위로하심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그날 저녁에 기도하는데 ‘내게 이런 상황이 왔을 때 과연 무엇이라고 고백했을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창 젊은 날에 갑자기 찾아온 죽음 앞에서 끝까지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한 희생자들에게서 깨닫는 것이 많았습니다.
희생자 가운데 죽음을 준비했던 자가 과연 누가 있었겠습니까? ‘죽음’이란 인생에 있어서 필연적이고, 또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야할 길입니다. 천하의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우리는 1분 후의 세상도 모릅니다. 지상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로 죽음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의 준비를 믿음으로 미리 하십시다. 그래서 눈앞에 죽음이 닥쳐와도 불안해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리 목숨처럼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굳게 지키고, 영적으로 병들어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특별히 미국의 총기 규제를 위해서, 다시는 이러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희생자들의 장례식을 위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위로하심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사랑을 흘려 보냅시다.”

어느 나라에 아주 의리가 있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임금 앞에 불충을 한 죄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딱한 사정이 있어 친한 친구에게 대신 좀 죄수 노릇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여보게, 내가 임금님께 불충을 한 죄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내일이 어머니 회갑 날이네, 내가 어머니 회갑 잔치만 끝내고 돌아올 테니 내 대신 3일 동안만 죄수 노릇을 해줄 수 있겠나?” “그런가? 걱정 말고 다녀오도록 하게 내가 대신 가 있을테니.”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죄 없는 친구가 대신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약속한 친구가 도착하지 않으므로 임금은 죄 없는 친구가 대신해서 사형을 당하여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시간이 되어 교수형을 시키려는 순간 저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멈추시오.” 약속한 친구가 돌아온 것입니다. “여보게 미안하게 됐네, 내가 어머니 회갑 잔치를 끝내고 부지런히 오려는데, 그만 장마가 지는 바람에 개울물이 불어서 이렇게 늦었네.” 하면서 말하자 교수대 위에 앉아 있던 친구는 “괜찮아, 나는 친구를 위해 죽어도 후회하지는 않아.”
이 말을 듣고 있던 임금이 그 두 사람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여보게들! 이 못난 임금을 용서해 주게, 나에게도 자네들 같은 동지가 있다면 이 나라 정치를 펴 나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걸세, 나도 자네들 사이에 끼어 주지 않겠나.” 하면서 임금이 감동을 하고 그들을 모두 풀어 주고 벼슬도 내렸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해 나가는데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다윗에게는 요나단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고, 요나단이 죽은 후에 다윗은 요나단의 죽음을 얼마나 애통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의 인간사를 살펴보면 친구가 친구가 아니요, 동료가 동료가 아닌 것을 종종 들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실리를 중요시 여기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필요할 때는 친구요 동료이지만 이젠 나에게 유익이 없다고 생각 될 때는 차갑게 등을 돌리며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 풍조인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사랑이 식어 싸늘해졌습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모든 이들이 사랑에 목말라 하고 사랑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내가 먼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며 감동을 주는 예본의 식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럴 때 사회가 변화고 내 주위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죄 없는 친구가 대신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약속한 친구가 도착하지 않으므로 임금은 죄 없는 친구가 대신해서 사형을 당하여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시간이 되어 교수형을 시키려는 순간 저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멈추시오.” 약속한 친구가 돌아온 것입니다. “여보게 미안하게 됐네, 내가 어머니 회갑 잔치를 끝내고 부지런히 오려는데, 그만 장마가 지는 바람에 개울물이 불어서 이렇게 늦었네.” 하면서 말하자 교수대 위에 앉아 있던 친구는 “괜찮아, 나는 친구를 위해 죽어도 후회하지는 않아.”
이 말을 듣고 있던 임금이 그 두 사람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여보게들! 이 못난 임금을 용서해 주게, 나에게도 자네들 같은 동지가 있다면 이 나라 정치를 펴 나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걸세, 나도 자네들 사이에 끼어 주지 않겠나.” 하면서 임금이 감동을 하고 그들을 모두 풀어 주고 벼슬도 내렸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해 나가는데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다윗에게는 요나단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고, 요나단이 죽은 후에 다윗은 요나단의 죽음을 얼마나 애통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의 인간사를 살펴보면 친구가 친구가 아니요, 동료가 동료가 아닌 것을 종종 들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실리를 중요시 여기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필요할 때는 친구요 동료이지만 이젠 나에게 유익이 없다고 생각 될 때는 차갑게 등을 돌리며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 풍조인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사랑이 식어 싸늘해졌습니다. 그러기에 어쩌면 모든 이들이 사랑에 목말라 하고 사랑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내가 먼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며 감동을 주는 예본의 식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럴 때 사회가 변화고 내 주위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에 충실 하는 삶”

옛날 어느 임금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세 가지 문제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 첫째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냐고 하는 것이고, 둘째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하는 것이며, 셋째는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냐고 하는 심각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많은 신하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로 해답을 말했지만 임금은 머리를 흔들며 만족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신하가 엎드리어 임금에게 고하기를 “임금님! 임금님께서 질문하신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사람이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제일 중요시하면 실수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인데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가장 중요시한다면, 그 일은 그르칠 염려가 적기 때문이며, 세 번째 질문하신 가장 중요한 때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인 줄로 압니다. 그리하면 허송세월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을 듣고 있던 임금님은 아주 기뻐하며, 그 사람을 당장 재상으로 등용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입니다. 바로 지금이 중요한 때입니다. 지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들을 작은 데서부터 그리고 나부터, 또한 지금부터 시작하고, 하나하나 크고 작은 일들의 뒤처리를 말끔히 하며, 때로는 여러 가지 유혹에 대해서 후퇴하는 지혜도 배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분명히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오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내일에도 충실하지 못합니다. 오늘 밤에 잠든 사이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가져가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예본의 모든 식구들은 오늘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입니다. 바로 지금이 중요한 때입니다. 지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들을 작은 데서부터 그리고 나부터, 또한 지금부터 시작하고, 하나하나 크고 작은 일들의 뒤처리를 말끔히 하며, 때로는 여러 가지 유혹에 대해서 후퇴하는 지혜도 배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분명히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오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내일에도 충실하지 못합니다. 오늘 밤에 잠든 사이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가져가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예본의 모든 식구들은 오늘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산을 옮깁니다.”

지난주간에 어느 분이 영상을 보내 주셨습니다. YTN 뉴스 영상이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해드리면, 인도에서 다친 아내가 험준한 산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해 끝내 숨지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며 산을 깎아 옮긴 만지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무려 22년 동안 오직 망치와 정만으로 산을 뚫어 길을 만든 집념에는 죽은 아내를 그리워한 남편의 절절한 사랑의 내용입니다. '마운틴 맨'으로 알려진 이 남성의 사연을 담은 영화도 최근 제작됐다고 합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모두 말렸지만 만지는 홀로 산과 외로운 사투를 벌입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산을 깎고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지은 뒤 어두워질 때까지 또다시 산을 깎는 일이 날마다 반복됩니다. 그 어떤 도움이나 지원 없이 무려 22년 동안 홀로 망치와 정만으로 산을 깎은 결과 기적처럼 길이 만들어집니다. 길이 110m, 폭 8m의 길입니다. 마을에서 병원까지의 거리는 기존 55km에서 15km로 단축됐습니다. 오직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그가 만든 길 덕분에 마을 주민들은 병원과 학교에 편하게 다닐 수 있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은 직업 훈련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큰 활력소가 되며 성공의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던 숱한 사람들, 돈을 미치도록 사랑하던 사람들, 명예를 죽도록 사랑하던 사람들은 결국 그것 때문에 죽어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도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해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맡기지 못하고 이 생각, 저 생각, 딴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세상을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22년간 오직 아내를 향한 절절한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며 기적을 이룬 인도의 만지 할아버지처럼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로 산 같은 장애물도 제거해 주시고 기적의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모두 말렸지만 만지는 홀로 산과 외로운 사투를 벌입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산을 깎고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지은 뒤 어두워질 때까지 또다시 산을 깎는 일이 날마다 반복됩니다. 그 어떤 도움이나 지원 없이 무려 22년 동안 홀로 망치와 정만으로 산을 깎은 결과 기적처럼 길이 만들어집니다. 길이 110m, 폭 8m의 길입니다. 마을에서 병원까지의 거리는 기존 55km에서 15km로 단축됐습니다. 오직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그가 만든 길 덕분에 마을 주민들은 병원과 학교에 편하게 다닐 수 있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은 직업 훈련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큰 활력소가 되며 성공의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던 숱한 사람들, 돈을 미치도록 사랑하던 사람들, 명예를 죽도록 사랑하던 사람들은 결국 그것 때문에 죽어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도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해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맡기지 못하고 이 생각, 저 생각, 딴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세상을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22년간 오직 아내를 향한 절절한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며 기적을 이룬 인도의 만지 할아버지처럼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로 산 같은 장애물도 제거해 주시고 기적의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

아주 먼 곳도 가깝게 여겨지고 아주 힘든 일도 즐겁게만 여겨지는가 하면 작은 일도 크게만 보이고 쉬운 일도 힘들게만 느껴지는 삶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옛날 어느 고을에서의 일입니다. 한 노인에게 온종일 손자를 등에 업고 있으라고 했더니 그 노인은 피곤한 줄 모르고 아이를 업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등에다 오줌을 싸서 등이 축축하게 젖었지만 손자를 등에 업고 있는 하루가 그렇게 행복 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그 노인에게 다 먹고 난 김칫독을 온종일 등에 메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1시간도 채 견디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말도 마슈, 엄청나게 무겁습니다. 김칫독이 훨씬 더 무겁더군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사실 그 무게는 손자의 몸무게와 똑같았는데도 말입니다. 똑같은 무게를 차이 있게 느낀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사랑의 힘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요. 생의 활력소가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다 떼여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는 커피 한 잔 값도 아깝기만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누구를 사랑해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말이 듣기 싫다. 어렵다, 이해가 안 된다. 깨닫기 어렵다’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한다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계속 듣기를 원합니다. 어려워도 이해가 저절로 됩니다.
‘성경 말씀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신앙생활이 피곤하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이 든다!’ 불평할 때가 있습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예수님을 잘 믿어보세요. 바르게 신앙생활 해보세요. 말씀이 이해가 되고, 다 믿어지고,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전혀 힘이 들지 않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세요. 할렐루야!
옛날 어느 고을에서의 일입니다. 한 노인에게 온종일 손자를 등에 업고 있으라고 했더니 그 노인은 피곤한 줄 모르고 아이를 업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등에다 오줌을 싸서 등이 축축하게 젖었지만 손자를 등에 업고 있는 하루가 그렇게 행복 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그 노인에게 다 먹고 난 김칫독을 온종일 등에 메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1시간도 채 견디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말도 마슈, 엄청나게 무겁습니다. 김칫독이 훨씬 더 무겁더군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사실 그 무게는 손자의 몸무게와 똑같았는데도 말입니다. 똑같은 무게를 차이 있게 느낀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사랑의 힘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요. 생의 활력소가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다 떼여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는 커피 한 잔 값도 아깝기만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누구를 사랑해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말이 듣기 싫다. 어렵다, 이해가 안 된다. 깨닫기 어렵다’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한다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계속 듣기를 원합니다. 어려워도 이해가 저절로 됩니다.
‘성경 말씀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신앙생활이 피곤하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이 든다!’ 불평할 때가 있습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예수님을 잘 믿어보세요. 바르게 신앙생활 해보세요. 말씀이 이해가 되고, 다 믿어지고,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전혀 힘이 들지 않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세요. 할렐루야!
“참된 은혜”

은혜란 오늘날 교회에서 제일 익숙하게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은혜를 충만히 주시옵소서!”라고 하며,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은혜 받으라.”고 듣습니다. 교회에 가면서 “은혜 받으러 가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현대 교인들이 은혜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러면 과연 은혜가 무엇입니까? 병든 사람이 병 고침을 받아야 은혜입니까? 방언이 터져 나와야 은혜입니까? 기도 할 때에 온 몸이 후끈 후끈하며 아래위로 진동이 와야 은혜입니까? 물론 이것도 은혜의 한 부분일 수 있지만 은혜를 한 마디 말로 정의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이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렸을 때 부모님과 여행을 가셨다가 부모님을 잊어버리셨던 경험이 있으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공원에 갔습니다. 엄마와 함께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신이 났습니다. 여러 동물들의 노는 모습도 구경하고,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들도 보며, 놀이터에서 비행기와 기차를 신나게 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즐겁게 뛰어 놀다가 이 아이는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저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 “저 인형도 가지고 싶어”하며 조르다가 아이는 칭얼대고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몰려 왔는지 엄마와 손을 잡고 가다가 그만 엄마의 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지만 엄마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많은 사람들 틈에서 엄마를 찾아내기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고, 드리어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합니다. “엄마, 엄마” 부르면서 울며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와서 “얘야, 울지 마, 아저씨가 엄마 찾아 줄게, 응” 아무리 달래도 이 아이는 그치지를 않습니다. “아저씨가 아이스크림 사줄까?” “싫어요!” “그럼 장난감 사줄까?” “싫어요!” 이 아이는 모든 것이 다 싫고 오직 엄마만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이 아이에게 장난감도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다 필요하지만 엄마 없이는 그 모든 것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엄마가 함께 있을 때에 비로소 그 모든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물질도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 심령에서 떠나가시면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잠자는 아이가 평안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힘이 되고 지혜가 되고 평안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그 자체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주간동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현대 교인들이 은혜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러면 과연 은혜가 무엇입니까? 병든 사람이 병 고침을 받아야 은혜입니까? 방언이 터져 나와야 은혜입니까? 기도 할 때에 온 몸이 후끈 후끈하며 아래위로 진동이 와야 은혜입니까? 물론 이것도 은혜의 한 부분일 수 있지만 은혜를 한 마디 말로 정의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이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렸을 때 부모님과 여행을 가셨다가 부모님을 잊어버리셨던 경험이 있으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공원에 갔습니다. 엄마와 함께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신이 났습니다. 여러 동물들의 노는 모습도 구경하고,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들도 보며, 놀이터에서 비행기와 기차를 신나게 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즐겁게 뛰어 놀다가 이 아이는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저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 “저 인형도 가지고 싶어”하며 조르다가 아이는 칭얼대고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몰려 왔는지 엄마와 손을 잡고 가다가 그만 엄마의 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지만 엄마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많은 사람들 틈에서 엄마를 찾아내기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고, 드리어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합니다. “엄마, 엄마” 부르면서 울며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와서 “얘야, 울지 마, 아저씨가 엄마 찾아 줄게, 응” 아무리 달래도 이 아이는 그치지를 않습니다. “아저씨가 아이스크림 사줄까?” “싫어요!” “그럼 장난감 사줄까?” “싫어요!” 이 아이는 모든 것이 다 싫고 오직 엄마만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이 아이에게 장난감도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다 필요하지만 엄마 없이는 그 모든 것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엄마가 함께 있을 때에 비로소 그 모든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물질도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 심령에서 떠나가시면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잠자는 아이가 평안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힘이 되고 지혜가 되고 평안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그 자체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주간동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학생부와 청년부 연합 수련회를 마치며......”

8월 20일(목) 오후부터 어제 오후까지 2박 3일간 롱아일랜드 동산기도원에서 “새로워지자(Renew)”라는 주제로 학생부와 청년부 연합으로 수련회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기도와 간식으로 지원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하며 철저하게 준비한 청년들과 사역자들의 말씀을 통해서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고 왔습니다. 시간 시간마다 수준 있는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열정적으로 강의에 임한 사역자들과 뜨겁게 기도하며, 강의 후 서로의 기도제목을 놓고 개인의 비전을 위해서, 전도대상자들과 가정과 교회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또한 늦은 밤에는 나눔의 시간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 서로 은혜 받은 것을 나누었으며 삶 속에서의 적용을 하기 위한 결단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둘째 날 오후에는 비로 인하여 정해진 프로그램을 수정하여 수련회에 참여한 모든 자들이 진지하게 짧지 않은 2시간여 동안 영어로 한국어로 분류하여 요한복음을 통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사복음서와 더불어 신약을 완독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잠자리는 조금 불편했지만 하나님께서 뜻이 계서서 이곳에 모이게 하시고, 기도하며 말씀으로 충만하게 됨을 감사하며 불편한 것들을 얼마든지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기도원에서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 주셔서 맛있게 먹고 왔습니다. 영육이 강건하여 돌아왔습니다.
우리의 다음세대들을 위해서, 특별히 수련회에 참여했던 청년들과 학생들이 받은 은혜를 늘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님을 본받는 자녀답게 세상 속에서 승리하며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기도와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기도하며 철저하게 준비한 청년들과 사역자들의 말씀을 통해서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고 왔습니다. 시간 시간마다 수준 있는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열정적으로 강의에 임한 사역자들과 뜨겁게 기도하며, 강의 후 서로의 기도제목을 놓고 개인의 비전을 위해서, 전도대상자들과 가정과 교회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또한 늦은 밤에는 나눔의 시간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 서로 은혜 받은 것을 나누었으며 삶 속에서의 적용을 하기 위한 결단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둘째 날 오후에는 비로 인하여 정해진 프로그램을 수정하여 수련회에 참여한 모든 자들이 진지하게 짧지 않은 2시간여 동안 영어로 한국어로 분류하여 요한복음을 통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사복음서와 더불어 신약을 완독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잠자리는 조금 불편했지만 하나님께서 뜻이 계서서 이곳에 모이게 하시고, 기도하며 말씀으로 충만하게 됨을 감사하며 불편한 것들을 얼마든지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기도원에서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 주셔서 맛있게 먹고 왔습니다. 영육이 강건하여 돌아왔습니다.
우리의 다음세대들을 위해서, 특별히 수련회에 참여했던 청년들과 학생들이 받은 은혜를 늘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님을 본받는 자녀답게 세상 속에서 승리하며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기도와 지원을 부탁드립니다.